“수학을 배우지 말고 수학자가 뭘 하는지를 배워라!”
언젠가 들은 말이 잊혀지질 않는다.
예를 들어, 복잡한 4차원 문제가 있다고 해보자. 수학자들은 먼저 1차원으로 문제를 풀어본다. 풀리면 2차원으로, 3차원으로 풀어본다. 쉬운 난이도로 문제를 해결한 뒤에 난이도를 높여가며 증명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내가 접한 수학은 매커니즘을 끼워맞추는 느낌이었다. 공식을 달달 외우고, 해설도 없이 다짜고짜 100 문제씩 풀었다. 입시에서 수학의 아름다움을 좇는 것은 사치이자,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었다.
수학의 쓰임새
고드프리 하디의 ‘어느 수학자의 변명’은 고등학생이던 내게 변명이 가득 담긴 반성문처럼 느껴졌다. 학문의 쓰임새를 부정하며 순수 수학을 쫓던 그가 입시 수학을 하던 내게는 너무 이상해보였다.
지금도 지식은 써야만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지금은 지식이 쓰이는 곳을 한정짓지 않는다. 공식은 잊어도 개념은 어렴풋이 남아 살아가며 도움을 받고 있다. 더 중요한 쓰임새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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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상수학과 컴포넌트
개발자로 일을 하며 ‘컴포넌트를 여러 곳에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위상수학은 추상화를 표현하는 좋은 개념 중 하나이다.
위상수학에서 머그컵은 도넛이 될 수 있지만 공은 도넛이 될 수 없다. 맘껏 모양을 바꿀 수 있지만 구멍을 더 뚫을 수는 없다. 컴포넌트 역시 정해진 구멍의 개수(interface)가 있다.
그렇다면 내가 집중할 곳은 두 가지로 정리된다. 어떤 모양으로 컴포넌트를 만들지. 어떤 모양으로 컴포넌트를 적용하는 곳을 다듬을지.
아이 때부터 우리는 추상화를 배웠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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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인수분해
한 팀원 분이 UX를 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내가 이전에 디자이너를 했을 때 어떻게 UX를 공부 했는지 물어보았다. 커다란 질문에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인수분해를 해볼 수 있을까. 그래서 물었다.
“OO님이 UX를 잘하게 되면 어떤 것들이 가능해질지 궁금해요. 혹시 UX라는 단어를 안 쓰고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대답이 돌아왔다. 그분에게 ‘UX = (기능을 바로 쓸 수 있게 만들기) ✕ (중요한 정보의 우선 배치)’라는 것을 알아냈다. 물론 여전히 크지만 어떤 것을 찾아보면 좋을지 전해줄 수 있었다.
샌드박스에서 시작하기
과학을 표현하기 위해 수학이 만들어졌다. 그렇기에 수학의 세상은 모든 것이 완벽하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수학에서는 아름다움을 쫓을 수 있다. 확실한 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열린계인 현실에서는 답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혹은 여러 개일수도 있다. 하지만 답을 찾는 과정에서 닫힌계를 안전한 샌드박스 환경처럼 사용할 수 있다.
샌드박스에서 작은 것부터 테스트한다. 그 뒤에 현실에 적용한다. 그 과정에서 부담과 걱정이 줄어들고, 더욱 과감한 베팅도 가능해질 것이다.
조금만 더 빨리 알았다면 좋았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