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엄마의 젓가락에 집힌 김치를 보고 도망을 쳤다. 김치는 너무 붉고 또 매워서, 김치를 들고 다가오는 엄마가 무서웠다. 그러나 지금은 김치볶음밥 한 숟갈에 김치를 올려 먹는다.
어린 나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온 힘을 다해 도망쳐왔던 나의 투쟁은 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나이가 들며 영양소가 부족해지면 사람의 뇌는 그 영양소가 든 음식을 맛있게 느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맛있는 것만 쫓는 만큼 사람은 말라가고, 이는 죽음을 빠르게 앞당긴다. 그렇기에 나는 말라갈 수 없었다.
그리고 고백할 것이 있다. 김치가 맛있어져서가 아니라 김치에 ‘익숙해져서’라고. 씻은 김치를 잘게 썰어 넣은 김밥에서 시작해, 김치볶음밥, 김치찌개, 이윽고 그냥 김치까지. 한입 했을 때 나쁘지 않았던 기억과 경험이 꾸준히 이어져 오며 지금이 되었다.
어른의 편식
편식이 쉬운 세상이다. 입으로 쑤셔들어온 김치를 씹어넘기지 않아도 나를 기다리는 음식은 너무나도 많다. 골고루 먹는 것은 어째 어른이 되니 더욱 쉽지 않다.
싫은 것을 나를 생각하며 떠밀어주는 사람도 없고, 편식이 내면의 평화와 안정감, 즐거움과 묶여버렸다. 생각해보라. 마지막으로 의도적으로 노력해서 먹기 싫은 것을 먹었던 적이 언제인가?
편식은 식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알고리즘은 일말의 불편함마저 없애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노출한다. 그렇게 도파민만 남은 공간 속에서 우리는 건조해지고, 또 말라간다.
하지만 우연히 먹었던 것이 꽤 맛있었던 적은 있다. 나는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곡 하나만 반복해서 들었다. 그러던 하루는 실수로 디스커버리 라디오를 틀었는데 모르는 곡이 흘러나와 바로 끄려고 했다. 그런데 전주의 기타 리프에 꽂혀 끝까지 듣게 되었다.
그 이후로 한 번씩 라디오를 틀었고, 팔칠댄스나 진저루트 같은 아티스트를 알게 되었다. 이내 조금 더 적극적으로 플레이리스트나 믹스테잎도 듣게 되었다.
물론, 우연이 없었어도 삶에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한입으로 나는 다른 즐거움을 찾았고, 삶이 조금은 튼튼해지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편식 고치기도 한입부터
편식은 이제 삶을 넘어 공동체로 확장된다. 확증 편향과 집단의 오류라는 편식을 고치려면 과거를 보며 놓쳤던 것, 눈을 돌렸던 것을 직시해야한다. 하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고치기 어려운 관성이 된다.
관성을 칼 같이 끊어낼 수는 없다. 누구도 노력의 결과가 요요현상이길 바라지 않는다. 가르침을 받고 바로 고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세상도 아닌 것 같다.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볼 어린 나에게, 그럼에도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다. 느끼한 음식에 김치 한 조각을 올려먹게 된 것처럼. 우연한 음악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던 것처럼. 피하던 것, 몰랐던 것을 마주하고, 그것이 나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전의 나보다 조금은 튼튼해졌다고 말해주고 싶다.
만약 편식으로 말라가는 삶을 행복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딱 한입을 시도해볼 용기를 갖자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한입이 만족감을 주는 한입이길 권한다. 한입이 여러 입이 되듯. 관성은 바꿀 수 없어도 덮어씌울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겨두고픈 편식은 있다. 누군가 내게 콩송편을 내민다면 피할 것이다. 이 정도 즐거움은 있는 게 좋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