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정리하시나요?

서랍, 정리하시나요?

외형적 깔끔함을 넘어 우연한 마주침을 찾아서

물건이 보이지 않아서 한참을 뒤적거리다 서랍을 열었다. 물건은 찾았지만 ‘왜 여기있지?’라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서랍마다 붙여둔 라벨도, 서랍 안에 만들어둔 칸들도 무의미하다 느꼈다.

돌아보면 우리는 구분짓길 좋아한다. 불확실한 것을 명확하게 만들고 싶고, 공통점을 찾아 모이고 싶어한다.
서랍도 마찬가지이다. 이 서랍에는 어떤 유형의 것들을 둘지, 서랍 안에 칸을 만들고는 어떤 물건을 둘지 한참을 고민한다. 고민의 끝에 얻게 되는 ‘외형적 깔끔함’은 만족스러움마저 안겨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서랍을 정리하면 오히려 의문이 생겨난다. 기준을 깨뜨리는 물건들이 튀어나오는가 하면,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같은 물건을 또 사기도 한다.

내 나름대로 정한 기준들은 보통 타인이 이해하기 어렵다. 떠올려보자. 내 방만 보면 한숨을 짓는 어머니 모습처럼. (심지어 어제 방을 정리했는데도)

한편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못찾는 경우도 있다. 물건은 정적이다. 하지만 기준은 시간이 흐르며 변하기도 한다. 어릴 땐 색깔별로 정리했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는 것처럼.

어쩌면 서랍에 물건을 넣는다는 것은 기억하기 위함이 아니라 잊어버리기 위함이 아닐까.


지식노동자에게도 경계해야할 서랍장들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사일로(Silo)’가 있다. 가까이에 있는 서랍장도 있다. 업무 메신저인 슬랙의 채널들을 생각해보자.

슬랙에서 채널을 만들고 이름을 붙인 뒤, 관련된 정보만 채널에 올린다. 조직의 규모와 관계 없이 시간이 흐를수록 채널은 많아지고, 또 세분화된다.

이는 무한히 늘어나는 서랍과도 같다. 정보가 어디 있는지 찾기 어려워지고, 비슷한 채널에 있어서 정보에서 소외되는 사람들도 생긴다. 되려 복잡해지는 것이다.

지식노동에서 이것이 더욱 끔찍한 것은 창발을 막는다는 점이다.
김인숙 시인의 책 『마주침의 발명』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우연한 마주침이 내 삶의 반짝이는 모퉁이와 미래를 발명해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마주침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큰 손실인가.


정리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랍장이 ‘보관’이라는 본연의 목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정리를 한다면 자주 해야한다. 나의 기준이 시시각각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구분은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하다. ‘이건 어디에 넣지?’를 한참 고민할테니까.

외형적인 깔끔함을 넘어 ‘우연한 마주침’을 생각해봐야한다. 연필이 있을 때 주변에 무엇이 있으면 내게 도움이 될지 생각해봐야한다. 정리의 기준보다 ‘패턴’을 찾을 때이다.

그러니 방 청소를 언제 하냐고 어머니가 묻는다면 이렇게 말해보자.
나는 우연한 마주침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