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의 우리들
창업, 미국, 그리고 Y Combinator라는 그라디언트

창업, 미국, 그리고 Y Combinator라는 그라디언트

급격한 그라디언트의 1년이었다. 작년 12월에는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고 올해 12월은 미국에서 글을 쓰고 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삶은 굴러가고, 몸과 마음을 모두 끌어써서 하루를 넘겨온 것 같다. 작은 성공과 이도저도 아닌듯한 미묘함, 그로 인한 불안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덕분일까, 스스로의 강한 모습도, 추하고 문드러진 모습도, 모두 열어보게 되었다.
롤러코스터가 재밌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도 롤러코스터가 높이 올라가서 재밌다고 말하지 않는다. 롤러코스터는 급격하게 내려가기 때문에 재밌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희열을 느끼지 못하고, 기구에서 내려 중력에 익숙해져야 비로서 재미를 느낄 뿐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기에 선택한 창업은, 특히 통장 잔고가 30만원 남은 팀에 공동창업자로서 합류하는 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꽤나 제정신이 아니었던 선택이었다. 첫 일주일 동안 내가 싸워야했던 것은 팀에 가득했던 무력감이었다. 이미 몇 번의 피벗이 실패로 돌아갔기에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캐럿을 그 마음에서 시작했다. 해외에 있는 잠재 고객을 인터뷰할 일이 있었는데, 영어가 부족해서 말을 많이 놓쳤던 것이 답답했다. 그래서 컴퓨터에서 나오는 소리를 따와서 자막으로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아이디어를 효준(CEO)에게 이야기했더니 ‘별로다’, ‘너가 영어 공부 더 해라’ 라는 이야기를 듣고 짜증이 났다. (효준은 마음이 힘들 때 말을 기분 나쁘게 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로 10분 정도를 써서 Figma에 아이디어를 그린 후 주변 지인들에게 5만원에 팔아봤다. 그러자 이틀만에 100만원이 모였고, 이를 효준에게 들이밀었다. “우리 2주 안에 이거 해야해.” 효준의 표정이 볼만했다.
그 이후로는 급격하게 불이 붙기 시작했다. 고객의 피드백을 받아 고치고, 수정하고, 다시 물어보고, 입소문이 터지고. 캐럿 출시 3일 만에 엔터프라이즈 계약을 따냈고 매출도 늘어나며 단시간에 상황이 좋아졌다. 팀의 색깔도 드디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팀원 모두가 세계에서도 손에 꼽는 기술력을 갖추고, 좋은 제품에 대한 높은 기준과 고집을 가졌음에도,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 이 팀의 병목이었던 것이다.
창업을 하며 몇 가지 목표가 있었다. 정말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 사람의 고용을 대체하는 도구를 만드는 것, 그리고 미국에서 인정 받는 회사가 되는 것이었다. 설령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아시아에서 크게 성공한 회사’보다 ‘그저 그런 미국 회사’가 되고 싶었다. 캐럿 덕분에 잠시 접어뒀던 꿈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3월에는 팀 전체가 1개월 간 샌프란시스코에 숙소를 구해 같이 먹고 살며 ‘지금의 캐럿으로는 미국에서 팔 수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고, 6월에 효준과 마루SF에 체류하면서는 ‘아예 새로운 제품(Aside)으로 분리하자’는 결정과 ‘무슨 일이 있어도 9월 15일에는 미국으로 옮겨오자’는 약속을 했다. 그건 내가 미국을 잘 알아서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다만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다.
올해 처음 미국 땅을 밟았다. 영어로 대화해본 적도 딱히 없다. 그래도 긴장되거나 기대되는 것은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게, 첫날에 알몸으로 약에 취해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과 강도를 목격하면 ‘아 그냥 이상한 동네구나’ 하고 확 식어버리게 된다. 여전히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있다. 대체 온도와 세기를 조절하는 수도꼭지가 따로 있는 걸까. 하지만 살다보니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한편으로는, 미국에 그러려니 해지는 감정을 느껴본 창업자분들이 아직도 적음을 느낀다)

고등학생일 때 스타트업에 관심을 가지며 Y Combinator를 알게 되었다. 그때는 ‘멋지다’는 생각만 했는데 막상 8년 뒤에 정말로 들어가게 될 줄이야. 7번의 시도(내가 들어오고는 3번) 끝에 얻어낸 결과였다. 생각보다 과정이 험난했는데, 봄 배치는 기술적 해자가 없다고 떨어졌고, 여름 배치는 한국 매출이 너무 많다고 떨어졌다. 오기가 생겨 미국으로 옮기는 것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결국 가을 배치(F25)에 합격하게 되었다.
YC 배치에 참여한 것은 인생에서 정말 큰 전환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전세계에서 오는 30,000여 개의 지원서 중 상위 0.5%에 꼽힌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이다. 어리지만 능력 있는 친구들과 만나 서로 도움을 주고 받고, 하나의 주제로 몇 시간씩 이야기도 나누고, 같이 파티도 했다. 주변 친구들이 급격하게 성장할 때, 우리가 되려 초라해보여서 압박감도 너무 컸다. 아침 8시에 일어나서 새벽 3시에 자는 나날이었다. 이렇게까지 감정과 체력을 쏟아내며 무언가를 만들고, 순수하게 기뻐하고, 그보다 더 많이 좌절하고 답답했던 적이 없었다. 벌써부터 친구들과 분위기가 그립다.
YC 덕분에 ‘아무것도 없는 아시아인’에서 그래도 미국인들과 같은 출발선에 서는 데까지는 왔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스탠포드 졸업장’ 같은 걸 받은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허들은 높고 갈 길은 멀다. 어떻게 하면 이 분위기와 감정을 그대로 이어나갈 수 있을까. 그리고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올 한 해다. 처음에 적었듯 체력과 마음을 남김 없이 쏟아냈기에 바닥을 볼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수술을 하게 되면서 한 달 정도를 갑자기 걷지 못하기도 했었고… 스스로가 될듯 말듯한 미지근한 상태를 정말 싫어한다는 걸 알았다(차라리 처참하게 망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감정적으로 지쳐있을 때 누군가 조금이라도 날카로운 말을 하면 크게 기분 상해한다는 것을 알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 싶은 생활 패턴이 있음을 알았다. 하나는, 주말에는 어떠한 일도 하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하루 종일 잠을 자도 괜찮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어울리거나 내키지 않는데 여행에 따라가지 않겠다. 다같이 한 집에 살면서 알게 된 점인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다음주에 쓸 체력과 생각의 여백이 생기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짧게라도 글을 쓰는 것이다. 상반기에는 주로 링크드인에 글을 올렸는데, YC 배치를 시작하면서 전혀 손을 대지 못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과 감정이 머릿 속에 굴러다녔고, 이윽고 배치 후반부 즈음에는 아예 사람이 고장나버렸다. 많은 것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만큼, 이를 풀어내고 받아들이기 위한 시간을 꼭 가져야만 한다는 걸 알았다.
Y Combinator 배치 토크 중에 Sam Altman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But a lot of bad shit is going to happen to you in the next few years. Some people fail and then they go on to be more successful. But the pain in the next few years is guaranteed for all of you, and I’m sorry.”
속된 말로 “너희의 앞으로의 몇 년은 확정적으로 X됐다”라는 말인데… 머리로는 ‘오래 가면 이기는 싸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지금보다 더 큰 고통과 어려움이 찾아와도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이 두렵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우리는 이미 몇 번 지옥의 피벗을 해봤다는 점이다. 어떻게 해야 무한 피벗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지도, 만약 지금의 사업이 실패하면 다음에 무엇을 해야할 지도 이미 알고 있다.
눈사람을 만드는 마음으로. 작게 시작해서 꾸준히 굴리고, 여러 번 묵묵하게 만들어가는, 길고 긴 여정이 이제 막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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