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이들과 함께 춤을 (다시)

멍청이들과 함께 춤을 (다시)

가슴을 뛰게 만들어주는 좋은 사람들의 공통점

거의 10년 전에 친구가 써주었던 글이 문득 떠올랐다. 얼마 전 ‘갈 곳이 많이 안보인다’는 지인의 말에, 내가 일하며 즐거웠던 순간들을 잠시 되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항상 똑똑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똑똑한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고 그때마다 많은 것을 배웠는데, 공통적인 것을 뽑다보니 단순 지적인 능력만으로는 이들을 모두 담을 수 없었다.

똑똑한 사람들과 일을 하면 즐거운 느낌을 받는다. 무언가를 해보고 싶어지고, 또 해주고(이뤄주고) 싶어진다. 때론 죽어라 싸울 때도 있지만, 그 후에 마음이 답답해지거나 무너질 것 같지 않고, 더욱 새롭게 움직이고 싶어진다. 심지어 저 사람이 말하는 고민과 걱정이 저 사람만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게 된다(마치 내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Failed by Succeeding — 성공했기 때문에 실패하는 아이러니한 시련을 맞게 된다. 팀의 규모가 커질 수록 팀이 ‘잘하게 되는 것’에 쓰는 시간이 줄어든다. 기존에 보지 못했던 업(業)의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게 되니, 당장 해야할 일은 너무 많아지고 손은 부족해진다. 자연스레 팀의 역동성도 줄어들 것이다. 생각을 해보자.

하나, “일단 하자”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뜻이 어디에 더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는가?

  • ‘효과적인 접근을 찾은 후에 더 집요하게 파고들자’

  • ‘그냥 하면 되는데 생각이 많네?’ 혹은 ‘왜 저러는거지?’

둘, ‘R&R’이라는 단어가 많이 들리는가. 혹은 조직에 선이 그어져있다는 느낌이 있는가?


사실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건 우리가 ‘똑똑하다’는 말을 너무 뭉뚱그려 쓴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고치려고 한다. 이들에게는 대상, 원인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 제약이 걸리는 상황의 탓을 하고, 더 많은 인풋(Input)을 받아들이면 내가 판단을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문제 자체를 완전히 녹여 없애버리고 싶어한다. 문제 A도 함께 풀리는 문제 B를 찾고, 문제에 공감해주는 사람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인다. 보다 과감하게 새로운 기회들에 베팅한다.

전자를 ‘똑똑하다’라고 명확하게 부를 수 있다면, 후자는 전자와는 다른 무언가로 볼 수 있다. 10여년 전 나와 내 친구는 이를 ‘멍청하다’고 부르기로 했다.

그렇다. 나는 사실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멍청한 사람들과 일을 하며 즐거웠던 것이다.

문득, 왜 이러한 멍청한 사람들이, 최소한 내 주변의 분들이, 작은 팀을 선호하고 또 속해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만약 실패를 하더라도 이들은 다른 회사에 쉽게 들어가거나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고, 애시당초 이들은 실패를 실패했다고 퉁쳐서 생각하지 않을 사람들이리라(상황의 여러 단면들을 보며 성공한 부분을 찾겠지).

시대도 이들을 뒷받침한다. AI 같은 기술의 발전으로 많은 일을 더 적은 힘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제 성장이 정체되어 전체 투자는 줄어도, 되려 시드(Seed) 투자는 꾸준하게, 더 많이 이뤄진다.


똑똑한 사람은 세상을 고치려 한다. 일반인들은 세상에 적응하고 산다. 멍청이들이 세상을 바꾼다. 10년 전부터 우리는 그렇게 믿고 살아왔지만, 힘들고 고단하면 무엇이든 잊혀진다.

급격한 변화를 쫓아 불나방 같이 뛰어들던 나도 지금은 힘이 조금 빠졌다. 지금은 내가 서있는 곳에 멍청해지는 마법을 불어넣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한편으로는 또 동경한다. 또 다른 멍청이를 만나게 될 수 있을까, 그때 함께 일하며 얼마나 즐거워하게 될까.